문학 속에 '한 문장'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다.

흠 하나 없이 완벽해 보이는 타인의 일상, 거대한 이념의 깃발, 모두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감동의 서사 속에서 나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둘러보세요.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날카로운 개념을 꼽으라면 단연 ‘키치(Kitsch)’일 것입니다.

흔히 조잡한 모조품이나 통속적인 예술을 뜻하던 이 단어는, 쿤데라의 손을 거치며 인간의 영혼을 옭아매는 거대한 실존적 최면의 이름으로 확장됩니다.

싸구려 감상의 진부한 미적 취향에서 인간의 존재방식으로 확장된 쿤데라의 키치(Kitsch)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이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부 5장 중에서

무균실의 세계 :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그렇다면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란 무엇일까요? 쿤데라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 속에서 지극히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바로 ‘똥(배설물)’에 대한 신학적(神學的) 고찰입니다. 신(神)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했고 이 세계가 완벽하다면, 인간의 내장 속 오물과 배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키치는 바로 이 불편하고 더러운 질문 앞에서 탄생합니다. 키치의 미학은 배설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신성한 창조 세계에 오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키치는 똥의 존재 자체를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시야 밖으로 추방해 버립니다.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추함, 질병, 악취, 죽음과 잔인한 모순을 눈앞에서 지워버린 채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며 감상적인 눈물을 글썽이는 태도. 키치는 인간 실존의 어두운 절반을 도려내어 만든 거대한 ‘무균실의 낙원’입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심리적 회피는, 신앙과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외피를 입는 순간 집단적인 거짓의 신전, 곧 키치가 됩니다.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부 13장 중에서

합의된 최면을 향한 반역 :
사비나가 가벼움을 택한 이유

소설 속 화가 사비나가 그토록 치를 떨며 거부했던 것이 바로 이 키치였습니다. 공산주의 치하의 프라하에서 펼쳐진 노동절 행진, 붉은 깃발 아래서 모두가 똑같이 짓고 있던 환한 미소, "우리는 행복하다"고 외치는 합의된 침묵도 폭력이었지만, 그녀를 더 깊이 질식하게 만든 것은 영혼의 영역까지 침범한 ‘종교적 키치’였습니다.

쿤데라는 6부 4장에서 중세 신학자들의 시선을 빌려 키치의 위선을 폭로합니다. 신학적 키치는 인간의 육체가 느끼는 쾌락과 흥분을 불결한 타락으로 보았기에, '천국에서는 성행위가 존재했더라도 동물적인 성적 흥분은 없었을 것'이라는 억지스러운 무균실의 환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신이 창조한 가장 원초적인 몸의 반응과 떨림마저 죄악시하며 지워버리려는 거대한 기만입니다.

사비나가 관능과 성행위의 쾌락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에로티시즘의 ‘가벼움’을 온몸으로 긍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에게 육체의 떨림은 타락의 증거가 아니라, 엄숙한 도덕주의와 신학적 키치가 씌운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는 가장 솔직한 반역이었습니다. 똥을 감추고, 관능의 흥분을 부정하며, 갈등과 의심이 거세된 완벽한 천국만을 연기하라는 세상의 요구를 그녀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비나가 아버지의 엄격한 규범을, 조국의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그리고 프란츠의 숭고한 도덕주의마저 차례로 배반하며 도망친 이유도 명확합니다. 타인이 강요하는 감상주의의 제단 위에 자신의 내밀성을 바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택한 ‘가벼움’은 결코 무책임한 방탕이 아니었습니다. 무겁고 거룩한 척하지만 실상은 인간의 배설도, 육체의 진실한 관능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거짓뿐인 키치의 성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가장 처절하고도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아브락사스의 시선 :
밝음과 어둠을 온전히 끌어안는 지혜

그렇다면 키치라는 달콤한 무균실에서 벗어나 삶의 진실에 가 닿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 속 상징, ‘아브락사스(Abraxas)’를 떠올리게 됩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세상의 절반만을 찬양하는 신앙의 위선을 지적합니다. 고결한 신에게만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어둠과 악마에게도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신적인 빛과 악마적인 어둠, 거룩한 영혼과 추한 육체의 배설을 모두 한 몸에 품고 있는 신, 아브락사스는 인간 실존의 가장 온전한 초상입니다.

키치가 어둠과 추함을 도려낸 반쪽짜리 세상만을 ‘진짜’라고 우기는 기만이라면, 진정한 실존의 성숙은 삶의 양면성을 두려움 없이 응시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아름다움 곁에 도사린 냄새나는 상처를 보고, 고결함 속에 숨겨진 본능을 직시하며, 환희뿐만 아니라 고통과 모순까지도 ‘내 삶의 피할 수 없는 일부’로 인정하는 태도. 밝음과 어둠을 두루 품는 아브락사스적 시선이야말로 우리를 키치의 최면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해독제입니다.

"신에게 예배를 드린다면, 악마에게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신의 이름은 Abraxas이다."

두 눈을 모두 뜨고 세상을 마주한다는 것

세상은 지금도 끊임없이 반짝이는 포장지를 내밀며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동의를 종용합니다. 흠 하나 없이 완벽해 보이는 타인의 일상, 거대한 이념의 깃발, 모두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감동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키치의 안락함에 젖어듭니다. 그러나 똥과 상처를 지워버린 채 바라보는 낙원은 화려할지언정 박제된 거짓일 뿐입니다.

오늘 나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가만히 물어봅니다. 보기에 편하고 달콤한 환상 뒤편으로 숨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추하고 아픈 진실까지도 온전히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신과 악마, 빛과 그림자, 거룩함과 배설을 모두 긍정하는 두 눈을 뜰 때, 우리는 비로소 군중의 거짓 합의를 벗어나 오롯이 살아 숨 쉬는 나만의 진리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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